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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이 눕는다

풀이 눕는다

‘풀’이라 하면 연상되어 떠오르는 구절이나 이야기들이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아무래도 시 한 편을 떠올리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김수영(1921~1968)

풀이 눕는다

비를 몰아오는 동풍에 나부껴

풀은 눕고

드디어 울었다

날이 흐려서 더 울다가

다시 누웠다

풀이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

날이 흐리고 풀이 눕는다

발목까지

발밑까지 눕는다

바람보다 늦게 누워도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

바람보다 늦게 울어도

바람보다 먼저 웃는다

날이 흐리고 풀뿌리가 눕는다

이 시에서 풀이 무엇을 상징하는가를 구태여 말하지 않아도 될 만큼, 많은 이가 알고 낭송하고 되새기는 시이다. 시인 김수영은 1968년 6월 15일 자정이 가까운 시간에 교통사고를 당하고 응급실로 옮겨졌지만 이튿날 숨을 거두었다. ‘풀’은 5월 29일 발표된 시로, 그가 살아 있을 때 마지막에 쓰인 시이다.

풀이 눕는다 : 풀 위의 바람. 바람에 흔들리는 풀

바람에 흔들리는 풀

이 시와 거의 함께 연상되는 구절로 ‘초상지풍(草上之風)’을 들 수 있다. ‘풀 위의 바람’이란 뜻이다. 《논어(論語)》 안연편(顔淵篇)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계강자(季康子)가 공자에게 정치에 관해 묻는다. “도(道)에 어긋난 사람을 죽여서 도가 있는 데로 나아가게 하면 어떻습니까?” 공자가 대답했다. “정치를 함에 어찌 백성을 죽인단 말인가. 그대가 선하고자 하면 백성들도 선해진다. 군자의 덕은 바람과 같고 백성의 덕은 풀과 같다. 풀 위에 바람이 불면(草上之風) 풀은 반드시 바람을 따라 쓰러질 것이다.” 공자는 위정자가 먼저 덕을 갖추면 백성은 저절로 덕을 갖춘다고 말한 것이다.

김수영과 공자가 비유한 풀과 바람은 각각 ‘민초’와 ‘위정자 또는 위세’로, 그 의미는 크게 보아 거의 같다. 다만 김수영은 풀에, 공자는 바람에 시선을 돌리는 듯하다. 김수영 자신이 풀에 가깝다면, 공자 자신은 바람에 가까워서였을까.

‘풀’과 관련되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사자성어 가운데 하나가 ‘결초보은(結草報恩)’이다. “풀을 묶어서 은혜를 갚는다”는 뜻으로,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에 나오는 이야기에서 유래했다.

춘추시대 진(晉)나라의 대신 위무자에게는 애첩이 있었다. 병이 든 그는 아들 위과에게 애첩을 친정으로 돌려보내 개가시키라고 유언했다. 그런데 병이 더 깊어져 정신이 온전치 못하게 되자 애첩을 순장시키라고 유언했다. 위과는 아버지가 숨을 거둔 뒤 어떤 유언을 따를지 고민하다가, 아버지가 정신이 온전했을 때 남긴 유언을 따랐다.

그 뒤 위과는 전쟁터에 나가 적군과 싸우다가 위기를 맞았다. 그때 갑자기 적군의 말들이 고꾸라지는 바람에 적장을 생포하고 큰 공을 세웠다. 위과가 말들이 고꾸라진 자리를 살펴보니 풀들이 매듭지어져 있었다. 묶인 풀에 걸려 말들이 고꾸라진 것이었다.

그날 밤 위과의 꿈에 한 노인이 나타났다. 노인은 위과가 친정으로 돌려보낸 여인의 친정아버지라 밝히며, 자신의 딸을 살려서 돌려보낸 것을 감사히 여겨 은혜를 갚기 위해 풀을 엮어 도왔다고 말했다.

이때 노인이 묶은 풀은 ‘수크령’이라고 알려져 있다. 국어사전은 수크령을 “볏과의 여러해살이풀. 높이는 30~80cm이며, 잎은 빳빳하고 좁은 선 모양이다. 9월에 검은 자주색 이삭이 잎 사이에서 나오는데 가시랭이와 털이 빽빽하다. 들이나 양지바른 곳에서 저절로 나는데 아시아 온대에서 열대까지 널리 분포한다”고 설명해 놓았다.

풀이 눕는다 : 수크령

수크령

《춘추좌씨전》은 공자가 편찬한 것으로 전해지는 역사서인 《춘추》의 대표적인 주해서 중 하나이다. 《춘추》는 중국 춘추시대(BC 770~476)의 일들을 기록한 책이니, 수크령이 얼마나 유서 깊은 풀인지 새삼 깨닫게 된다. 수크령은 길이도 길고 빽빽하게 자라니 매듭을 묶어두어도 표가 나지 않는다. 게다가 “근경에서 질기고 억센 뿌리가 사방으로 퍼지”기 때문에, 건장한 말도 걸려 넘어질 수 있었을 것이다.

백과사전에서는 한국, 중국에 흔한 풀이고 전국적으로 분포한다고 설명해 놓았다. 저절로 잘 자랄 뿐 아니라 봄부터 겨울까지 변화된 모습을 감상할 수 있어 공간 조성과 조경에 도움이 많이 되는 풀이라고 한다. 춘추시대로부터 수천 년이 흐른 오늘날에도, 수크령은 장식용과 관상용으로 여전히 ‘은혜’롭다.